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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계유정난과 사육신 박팽년(전기 수필 )

등록일
2017.03.21
작성자
32회 김시종 [IP : 121.151.8.157]
조회수
685
분류
일반게시글

                                                                                계유정난과 사육신 박팽년

                                                                                               김시종

                                                                                                                      ksjong4321@hanmail.net


  문종 재위 2년 3개월 만에 국왕은 39세로 사망하자, 적장자 왕위계승에 따라 문종의 장자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였다.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서열이 가장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당시 대왕대비는 없었다.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낳은 다음 산욕열로 죽고 없었다.

  정치적 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은 고명대신 황보인, 김종서 등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세종과 소헌왕후 슬하에 문종 외 여섯 대군이 있었다. 왕권은 약하고 신권은 강했다. 여섯 대군은 왕권에 큰 위험이 되었다.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 안평대군은 서로가 세력 경쟁을 하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주위에 문무에 뛰어난 문객을 많이 모았다. 안평대군은 정치적 관심보다 문학예술을 좋아해 이 방면의 동호인을 끌어 들렸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정치적 연결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황보인과 김종서는 고명대신으로서 어린 단종을 위해 충성을 다해 보필하려고 했을 뿐, 야심을 품고 붕당을 조성하지는 않았다. 다만 대신들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국왕을 보필하고 정사를 협의하는 최고 정무기관으로서 본래 임무를 넘어섰던 것은 사실이었다.


  수양대군이 거사를 계획한 시기는 단종 즉위 후 2개월이 지난 1452년 7월경으로 추정되며, 이 무릎 권람이 수양대군을 방문 정계의 움직임에 대한 소상히 진심을 털어놓았다. 이때부터 수양대군은 대권에 야심을 품고 권람, 홍윤성, 한명회 등을 심복으로 삼았다.

  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은 명나라에서 고명 사은사로 돌아온 후 1453년 4월부터 급진전했다. 신숙주를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 양정 등의 심복 무사를 양성해 거사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해 10월 10일 밤, 유숙, 양정, 어을운(於乙云) 등을 데리고 김종서를 찾아가 간계를 써서 철퇴로 김종서를 쓰러뜨리고, 황보인, 조국관, 이양 등 여러 대신을 왕명으로 밀소하여 궁문에서 퇴살 하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숙청한 수양대군은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했었다. 거사에 직간접으로 공을 세운 성삼문, 정인지, 박팽년, 권람, 한명회, 양정 등 43인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했다.

  수양대군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김종서와 뜻을 같이하는 이징옥을 파면했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1453년에 일어난 이징옥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중앙과 지방의 적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수양대군은 1454년 한명회, 권람 등 폐덕한 무리의 강요로 단종은 삼촌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14세에 상왕이 되었다. 세조는 즉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던 사건이 계유정난이었다.

  세조의 집권은 집현전 출신 유학자들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세조 2년(1456년) 6월 2일 성균사예 김질과 장인 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의 불 궤를 고하고, 6월 6일 세조는 집현전을 파하고 경연을 정지하였으며, 소장하던 책을 예문관으로 옮기게 하였다. 왕의 전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의정부 서사 제도를 폐지하고 육조 직계제를 시행했다. 이는 의정부의 권한 약화와 왕권 강화를 위하여 국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 운영을 지향한 결과였다. 집현전 출신 유신들은 즉시 반발하였다.


  일부 유신들은 1456년 단종(16세)로 상왕으로 있을 때, 세조를 몰아내고 폐위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도모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사육신의 단종복위 계획이었다. 단종 복위의 명분은 세조의 불의와 찬탈에 대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같은 정치 운명론을 둘러싼 신권과 국왕권의 대립이었다. 집현전의 유학자가 참여한 이 계획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중심으로 단종복위 계획이었다.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명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를 이용하여 세조를 살해할 계획이었으나 한명회의 주장으로 연회 절차에 변동이 생겨 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단종 복위에 참여한 김질이 불안을 느끼고, 장인인 정창손에게 알리고, 정창손은 세조에게 고변하였다. 세조는 이들을 잡아들였고 거사는 실패하였다.

  주모자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의 사형 집행은 세조 2년(1456년) 6월 8일 옥사하거나 모두 처형당했다. 1457년 단종은 패 위 되어 노산군으로 강등 당하고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세조가 금부도사 왕방연을 시켜 유배지 영월에 가서 사약을 주라고 명하고 단종은 사약을 먹고 사사賜死 당했다.

  단종 복위를 계획한 이들을 사육신으로 명명한 것은 남효온이 지은 <추강 집 秋江 集 >에 나오는 <육신 전 六臣 傳>에 의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과 추강집의 기록이 달라 육신六臣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사육신의 구성은 변경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박중림, 권자신, 김문기, 성승, 박쟁, 송석동, 최득지, 최치지, 윤영손 ,박기년, 박대년 등 17인이 반역을 꾀했으나, 주모자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순으로 6인 만이 기록되어 있다. 김문기는 도진 무로서 박팽년과 모의할 때 군 동원의 책임을 졌다고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에 따라 김문기를 현창顯彰하고 서울시 동작구에 있는 사육신묘에 김문기의 가묘 假墓가 설치되었다.


  세조 2년 (1456년 6월 8일) 사육신이 사형 집행을 당한 후 한 의사 義士가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은 쓰지 못하고 박씨 지묘, 성씨 지묘라는 글만 표석에 새겨졌다. 이 묘역은 1978년 사육신 공원으로 단장되었으며, 장릉 裝陵 충신단 忠臣壇에 배향되어 있다.


  사육신 가운데 유일하게 후손이 유지된 분이 있었다. 박팽년朴彭年 이시다. 그의 부친 박중림이 터를 잡고 살았던 회덕 현 왕대 벌(지금의 대전시 동구 가양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순천 順天, 자는 인수 仁叟, 호는 취금헌 醉琴軒, 시호는 충정 忠正公이다. 세종 14년 (1432년) 사마시에 합격 생원이 되고, 1434년 (세종 16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평소 가야금 타기를 좋아해 스스로 취금헌이라는 호를 지었다. 성삼문과 함께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5년 세조 즉위 1년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세조 2년(1456년) 6월 8일에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세조의 명을 받은 도승지 구치관이 박팽년을 회유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옥중으로 갔으나 그 대답은 詩 한 수로 대신했다.

당시 시 구절을 인용해 보면

金 生 麗 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 나며

아름다운 물에서 금이 난다고 해서 물마다 금이 나으며

玉 出 崑 崗인들 뫼마다 옥이 나라

곤강에 옥이 난다고 해서 산마다 옥이 낫겠는가

아무리 女 必 從 夫인들 임 마다 좇을 소냐.

아무리 사랑이 중요하다고 하들 임 마다(아무 임이나 다)따르겠는가?

박팽년은 금생 여수란 詩를 얼고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8일 만에 순절하였다.

  아버지 박중림, 동생 대년, 아들 3형제도 사형당했다. 그 후 1691년 (숙종 17년) 신원 되었고, 1758년 (영조 34년)에 지헌대부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로 증직된 분이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이다.

둘째 아들 박순의 아내 성주 이씨도 관비가 되어 친정 동네인 묘골 (하빈면 묘리)로 내려갔다. 당시 부인이 임신 중이었는데 아들을 낳으면 죽임을 당하고 딸이면 관비로 삼게 되어 있었다. 해산하니 아들이었고,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서 아기를 바꾸어 키워 아이는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박비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키워진 아이가 17세가 되었을 때 그의 이모부 이극균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처가에 들렸다가 성장한 박비를 보고 자수할 것을 권한다.

  이때 조정에서는 사육신들에 대해 옳은 일을 했다는 여론이 일고 있어서 임금을 찾아가 박팽년 선생의 자손임을 이실직고하였다. 성종은 크게 기뻐하면서 특사령을 내리는 동시에 이름도 박일산으로 고쳐 주었다. 달성군 하빈면 묘골이 충절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후손이 없는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종택을 짓고, 묘골에 정착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사육신의 여섯 가문 가운데 유일하게 대를 이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며 묘골 순천 박씨의 입향시조가 되었다.

  박팽년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로 “취금헌 천자문”이 있으며, 박팽년의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 1동 185-2 사육신 묘역에 있다.



참고 문헌 : 육신 전,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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